주일예배

2025년 6월 29일 (성령강림후 3주, 연중13주) 주일예배 
예수를 따르려면 
 (루가복음 9장 51-62)








2025년 6월 22일 (성령강림후2주, 연중12주) 주일예배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바라봅시다. 무엇이 먼저 입니까? 
 (루가복음 8장 26-39)



(음향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개선책을 찾겠습니다.)







2025년 6월 15일 (성삼위일체주일) 예배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
 (요한복음 16장 12-15)






2025년 6월 1일 (환경주일) 특별찬양 및 후주 
(성가 350 영롱한 무지개를 보라)






2025년 6월 8일 (성령강림절 - 세례성사) 예배 
성령을 약속하신 주님
 (요한복음 7장 37-39)










2025년 6월 1일 (승천후주일, 환경주일) 예배 
하나됨을 말씀하신 주님
 (요한 17장 20-26)





2025년 5월 25일 (부활 6주) 주일예배 
간절한 마음이 말씀을 만나면 (요한 5장 1-9)







2025년 5월 18일 (부활 5주) 야외예배 
사랑을 말씀하신 주님 (요한 13장 31-35)
장소: Bull Run Regional Park(Centreville, VA)





2025년 4월 27일 (부활 2주) 성요한교회와 합동예배 

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가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실수로 화면을  눕게 촬영하였습니다) 





2025년 4월 20일 부활절예배 
부활 내가 만난 가장 기쁜 소식












2025년 4월 13일 고난주일 예배



예수 십자가 고난의 의미 (설교 요약)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성지(聖枝)주일과 고난(苦難)주일 의향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십사처기도를 드리고, 성지가지를 축복하고, 복음 말씀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수난(受難)복음을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고난’(苦難)에 집중합니다. 고난을 경험해 보셨는지요?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 합니다. 고난보다는 달콤함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 마음 이해되기도 합니다. 고난의 거부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부러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고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산이 오름과 내림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인생은 그리고 세상은 순경(順境)과 고난이 함께 존재합니다. 고난에 대한 성찰이 필요 합니다.


오늘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흉악범이 받는 십자가형을 받았고, 죄수와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았고, 극심한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세상의 고난과 비교하여 그 의미와 성격이 다릅니다개인의 탐욕, 무지, 방심, 집착, 분노, 자만, 부주의, 죄에서 온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진리를 위한, 사랑을 위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예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의 고난은 우리를 새로운 길, 창조의 길,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가져오는 어머니의 산고(産苦)가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고난의 대면은 진리, 사랑, 영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간디는 고난을 생명의 원리로 보았습니다. 개척자나 선구자의 길은 힘이 듭니다. 새로운 길은 앞서 가는 자 곧 개척자나 깨달은 사람의 고난 고통 없이는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나 고난 없이 이루어지는, 진정 새롭고 아름다우며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고난주일에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고난의 의미에 감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예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길, 삶의 완성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육체를 넘어, 영원한 세상,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셨습니다. 수난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의부활’(復活)은 철학적 분석이나 형이상학적 이론, 혹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명상이나 종교적 사유에서 나온 이론(理論,Theory)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전적인 응답이요 긍정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부활입니다.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들이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함께 하라고 말씀합니다. 개인의 욕망이나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 어둠을 몰아내고 진리를 지켜내려면, 모든 생명과 하느님의 피조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써 치열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의 고난을 대면(對面)하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이 시간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그 고난에, 그 아픔에, 죽기까지 순종한 그 순종에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삶 속에서 고난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2025년 3월 30일 사순 4주 주일예배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 큰 아들 (설교 요약)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순 4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루가복음 15(11-32)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읽었습니다성경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너무도 유명한 비유입니다. 루가복음 15장에는 보물같은 세 개의 비유가 들어 있지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비유, 잃었던 은전을 찾은 비유 그리고 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왜 예수께서 이런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 배경이 루가복음 15 1-3 절에 나오지요. 당시 유다인들은 세리(稅吏)들이나 여인들을 무시하였고 장애인이나 질병이 있는 사람들,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죄인으로 여겨 멀리하고 멸시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으로 여기고 무시하고 천시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와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몹시 못마땅해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세개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세 비유의 결론은 모두 같습니다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이런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은, 하느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 그런데 당신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돌아오면 왜 하느님처럼 기뻐하지 않고 못마땅해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 큰아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특별히, 돌아온 동생을 냉랭하게 대하고 아버지에게 화를 낸 큰 아들의 마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탕자 동생은 돌아왔고, 아버지는 큰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기쁨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동생을 냉랭하게 대했고, 동생을 받아주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고,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왜 동생에게 이리 무정(無情)하게 대하고, 아버지의 기쁨의 잔치에 함께하지 못했을까요?

먼저 큰 아들의 마음에는 동생을 ‘잃어버린 존재’로 보는 마음이 없었습니다그는 집을 떠난 동생에 대한 안타까움, 아파하는 마음, 어찌 지내나 하는 궁금한 마음, 보고 싶은 그리움, 연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떠난 망나니 같은 동생에 대하여 미움과 분노의 마음이 가득했을지도 모릅니다. 동생을 잃어버린 존재로 여기는 마음이 없지요. 마음이 없으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립지 않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큰 아들은 돌아온 탕자 동생을 사랑으로 맞이해 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탕자 동생을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자신과 동일하게 혹은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아버지에게 화를 낸 이유입니다. 사랑도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와 온도(°c) 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사순절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알아가는 사순절, 하느님의 사랑의 온도(‘그리스도°’)를 회복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어쩌면잃어버린 형제 의식없이 무정하게 살며, 하느님의 크고 깊고 넓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산 큰 아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오늘 나요, 우리일 수 있습니다사순절입니다. 주님의 집으로 돌아올 잃어버린 형제자매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에, 내 마음에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을 잊은 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며, 탕자를 받아 준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합니다.